注
尸子
에 曰 君子漸於飢寒而志不僻
하고 侉於五兵而辭不懾
하고 臨大事不忘昔席之言
이라하니
昔席은 蓋昔所踐履之言이라 此細는 亦當讀爲昔이라 或曰 細席은 講論之席이니 臨難不忘素所講習忠義之言이라
漢書王吉諫昌邑王曰 廣廈之下와 細旃之上이라하니라
○盧文弨曰 案廣韻에 侉는 痛呼也니 安賀切이라하니라 宋本에 作銙어늘 字書無攷라 今從元刻이라
郝懿行曰 細席은 恐茵席之形譌라 蓋茵假借爲絪하고 絪又譌爲細耳라
王念孫曰 郝說是也라 漢書霍光傳의 加畫繡絪馮에 如淳曰 絪亦茵이라하니 是其證이라
茵席之言은 謂昔日之言이니 即論語所謂平生之言也라 故尸子云 臨大事不忘昔席之言이라하니라
俞樾曰 郝王之說塙矣라 楊注引尸子의 臨大事不忘昔席之言의 昔은 亦茵之譌라
荀子에 作細席者는 其原文是絪席也요 尸子에 作昔席者는 其原文是茵席也니 兩文雖異而實同이라
환난患難에 직면하더라도 지난날 〈강론하는〉 자리에서 하던 말을 잊지 않아야 한다.
注
양경주楊倞注:≪시자尸子≫에 “자하子夏가 ‘군자君子는 굶주림과 추위의 고통을 많이 겪더라도 심지心志가 비뚤어지지 않고, 흉기의 위협을 받더라도 말이 〈엄정嚴正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큰일에 직면하더라도 지난날 강론하는 자리에서 하던 말을 잊지 않는다.[臨大事不忘昔席之言]’라 했다.”라고 하였으니,
석석昔席은 지난날 실천했던 말이다. 이곳의 세細는 또한 마땅히 ‘석昔’으로 읽어야 한다. 혹자는 “세석細席은 강론하는 자리이니, 환난患難에 직면하더라도 평소에 강론하고 익힌 충성과 도의道義에 관한 말을 잊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서漢書≫ 〈왕길전王吉傳〉에, 왕길王吉이 창읍왕昌邑王에게 간하기를 ‘광하지하廣廈之下 세전지상細旃之上(넓은 저택 안과 고운 털방석 위에서 〈현명한 스승이 앞에 앉아 있고 글 배우는 제자가 뒤에서 글을 읽는다.〉)’이라 했다.”라고 하였다.
○노문초盧文弨:살펴보건대, ≪광운廣韻≫에 “과侉는 고통스러워 소리친다는 뜻이니, 〈그 음이〉 안安과 하賀의 반절이다.”라고 하였다. 〈양씨楊氏 주에 인용된 ≪시자尸子≫의〉 과侉가 송본宋本에는 ‘과銙’로 되어 있는데, 자서字書에는 알아볼 곳이 없다. 여기서는 원각본元刻本을 따랐다.
학의행郝懿行:‘세석細席’은 아마도 ‘인석茵席’의 모양이 잘못된 것 같다. 대개 ‘인茵’의 가차자假借字로 ‘인絪’이 되었고, ‘인絪’이 또 잘못되어 ‘세細’로 되었을 것이다.
왕염손王念孫:학씨郝氏의 설이 옳다.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의 “가화수인빙加畫繡絪馮(아름답게 수놓은 방석 등을 추가하였다.)”이라 한 곳의 주에 홍여순洪如淳이 “인絪 또한 인茵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
인석지언茵席之言은 지난날에 했던 말을 이르니, 곧 ≪논어論語≫ 〈헌문憲問〉의 이른바 ‘평생지언平生之言(평소에 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시자尸子≫에 ‘臨大事不忘昔席之言’이라 한 것이다.
유월俞樾:학씨郝氏와 왕씨王氏의 설은 틀림없다. 양씨楊氏의 주에 인용한 ≪시자尸子≫의 ‘석昔’은 이 또한 ‘인茵’의 잘못이다.
≪순자荀子≫에 ‘세석細席’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원문이 ‘인석絪席’이고, ≪시자尸子≫에 ‘석석昔席’으로 되어 있는 것은 그 원문이 ‘인석茵席’이니, 두 글이 다르지만 사실은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