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當其人習說之時면 則尊高而徧周於世事矣요 六經則不能然矣라
○ 郝懿行曰 案方은 古讀如旁하고 亦讀如傍하니 此方當讀爲依傍之傍이라
言親近其人而習聞其說이면 則稟仰師承하여 周徧於世務矣라
習有積貫之義하니 非近其人이면 則不能常習其說이라
任數篇習者曰
에 高注 習近習
이라하니 是習與近義亦相通
이라
言習其說에 即知是近其人이니 不必讀方爲傍하여 轉致文義支離也니라
그 사람을 본받아 군자의 학설을 배워 익힌다면 덕이 높아지고 식견이 넓어져 세상사에 두루 통달할 것이다.
注
양경주楊倞注 : 훌륭한 스승이 군자의 학설을 배워 익히던 지난날의 그때와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되면 덕이 높아져 세상사에 두루 통달할 것이고 육경六經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 학의행郝懿行 : 살펴보건대, ‘방方’은 옛날에 ‘방旁’자처럼 읽었고 또 ‘방傍’자처럼 읽기도 하였으니, 이 ‘방方’은 마땅히 ‘의방依傍’의 ‘방傍’으로 읽어야 한다.
그 사람을 가까이하여 군자의 학설을 익히 듣는다면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을 삼가 받들고 따라 세상사에 두루 통달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배우는 도는 그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선겸안先謙案 : 학씨郝氏가 ‘방方’을 ‘방傍’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한다면 ‘습習’ 위 ‘지之’자의 뜻이 통하지 않는다.
‘습習’자는 계속 익힌다는 뜻이 있으니, 그 사람을 가까이하지 않는다면 그의 설을 항상 익힐 수 없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임수편任數篇〉의 ‘습자왈習者曰’ 아래 고유高誘 주注에 “‘습習’은 가까이해 익히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습習’자는 ‘근近’자와 뜻이 또한 서로 통한다.
그의 설을 익힌다고 말했으면 곧 그 사람을 가까이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굳이 ‘방方’을 ‘방傍’으로 간주해 읽어 도리어 글 뜻이 조리가 없게 만들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