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楊朱는 戰國時人이니 後於墨子라 與墨子弟子禽滑釐辨論하니라 其說在愛己로 不拔一毛以利天下하니 與墨子相反이라
衢涂는 岐路也라 秦俗以兩爲衢라 或曰 四達謂之衢라하니라 覺은 知也라 半步曰蹞라 跌은 差也라
言此岐路第過擧半步
면 則知差而哭
이어든 況跌千里者乎
아 故甚哀而哭之
라 也
라하니라
○郝懿行曰 下一夫字는 疑當作末이니 形缺而譌라 末者는 無也니 言無有覺知而哀哭之者라
劉台拱曰 覺跌千里는 言至千里而後覺其差니 注似非라
顧千里曰 覺는 疑當讀爲較니 音校라 孟子音義離婁下告子上盡心下에 覺音校 凡三見이라
은 在本書覺有校義一條
라 文選西京賦注
에 引鄧析子賢愚之相覺
는 若九地之下與重天之顚
도 亦覺義之一證
이라
則言此衢涂過擧第半步
라도 而其較之乃差千里明甚
이라 楊讀覺
하여 以覺知爲義
하니 非也
라
又下文覺도 亦讀爲較니 不覺는 言不較榮安存三者與辱危亡三者之衢也라 楊注以不知爲義하니 亦非라
兪樾曰 覺는 當爲𣱓라 玉篇引聲類曰 𣱓는 誤也라하고 廣雅釋詁同이라 𣱓訓誤니 正與楊注跌訓差 其義相近이라
言此岐路第過擧蹞步라도 而其𣱓跌乃至千里라 故可悲也라 自𣱓誤爲覺로 而義不可明矣라
先謙案 衢涂過擧蹞步에 卽覺其跌至千里니 喩人一念得失에 可知畢生이니 不必果至千里而後에 覺其差也라
下文覺字는 與此相應하니 不當改字라 下夫字上屬爲句라 諸說皆未當이라
注
양경주楊倞注:양주楊朱는 전국戰國 때 사람이니, 시대가 묵자墨子보다 늦다. 묵자墨子의 제자 금골리禽滑釐와 논변을 벌였다. 그의 설의 요지는 자기를 친애해야 한다는 데에 있는 것으로, 자기 몸에 붙은 털 하나라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해주지 않으니, 묵자墨子와는 반대이다.
구도衢涂는 갈림길이다. 진秦나라 지방의 풍속에 두 갈래 길을 ‘구衢’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사방으로 통하는 길을 ‘구衢’라고 이른다.”라고 하였다. 각覺은 안다는 뜻이다. 반걸음을 ‘규蹞’라고 말한다. 질跌은 어긋난다는 뜻이다.
이 갈림길을 반걸음만이라도 잘못 가면 어긋났다는 것을 알고 곡을 하는데 하물며 천 리나 잘못 간 경우이겠는가. 그러므로 매우 슬퍼서 운다는 말이다. ≪역경易經≫에 “호리毫釐의 미세한 오류가 천 리의 잘못을 초래한다.”라고 하였다.
○학의행郝懿行:아래의 ‘부夫’ 한 자(‘각질천리자부覺跌千里者夫’의 ‘부夫’)는 아마도 마땅히 ‘말末’로 되어야 할 것이니, 모양이 이지러져 잘못된 것이다. ‘말末’이란 없다는 뜻이니, 잘못되었음을 깨달아 알고서 슬피 우는 자가 없다는 것을 말한다.
유태공劉台拱:각질천리覺跌千里는 천 리까지 이른 뒤에 그 어긋난 것을 깨닫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양씨楊氏의 주는 틀렸다.
고천리顧千里:교覺는 아마도 마땅히 ‘교較(비교하다)’로 읽어야 할 것이니, 음이 ‘교校’이다. ≪맹자음의孟子音義≫의 〈이루 하離婁 下〉‧〈고자 상告子 上〉‧〈진심 하盡心 下〉에 ‘교覺는 음이 교校이다.[교음교覺音校]’라는 문구가 세 번 보인다.
노학사盧學士(노문초盧文弨)의 ≪종산찰기鍾山札記≫의 내용 속에 본서本書의 ‘교覺’자가 ‘교校(비교하다)’의 뜻을 지녔다는 한 조항을 끼워 넣을 법하다. ≪문선文選≫ 〈서경부西京賦〉 주에 인용된 ≪등석자鄧析子≫의 “현우지상각 약구지지하여중천지전賢愚之相覺 若九地之下與重天之顚(현명한 자와 어리석은 자의 차이는 마치 땅의 가장 낮은 곳과 하늘의 가장 높은 꼭대기와 같다.)”도 ‘교覺’자의 뜻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이로 보면 이 갈림길에서 반걸음만 잘못 가더라도 비교해보면 곧 천 리나 어긋난다는 뜻으로 말했다는 것이 매우 분명하다. 그런데 양씨楊氏는 ‘교覺’를 여자如字로 읽어서 ‘안다’는 뜻이라고 풀이하였으니, 틀렸다.
또 아래 글의 ‘교覺’도 ‘교較’로 읽어야 하니, 영광‧안전‧생존 세 가지와 치욕‧위험‧멸망 세 가지의 갈림길을 비교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양씨楊氏의 주는 〈불교不覺를〉 모른다는 뜻으로 풀이하였으니, 이 또한 틀렸다.
유월兪樾:교覺는 마땅히 ‘효𣱓’로 되어야 한다. ≪옥편玉篇≫에 ≪성류聲類≫를 인용하여 “효𣱓는 ‘오誤(잘못하다)’의 뜻이다.”라 하였고 ≪광아廣雅≫ 〈석고釋詁〉도 그와 같다. 𣱓는 잘못되었다는 뜻이니, 곧 양씨楊氏의 주에서 질跌을 어긋난다는 뜻으로 풀이한 것과 그 뜻이 가깝다.
이 갈림길에서 반걸음만 잘못 가더라도 그 어긋난 정도가 천 리나 벌어지기 때문에 슬퍼할 만하다는 것을 말한다. 효𣱓가 ‘교覺’로 잘못된 뒤로 그 뜻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선겸안先謙案:갈림김에서 반걸음이라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간다면 그 즉시 천 리나 어긋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한 생각이 맞느냐 틀리느냐에 따라 앞으로 평생의 사정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니, 반드시 끝내 천 리까지 간 뒤에 그 잘못을 깨닫는 것은 아니다.
아래 글의 ‘각覺’자는 이곳과 서로 호응하니, 마땅히 이 글자를 고치면 안 된다. 아래의 ‘부夫’자(‘각질천리자부覺跌千里者夫’의 ‘부夫’)는 위로 붙여 문구가 된다. 여러 설들은 모두 타당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