注
大路는 殷祭天車니 王者所乘也라 未集은 不集丹漆也라 禮記云 大路素而越席이라하고
又曰 丹漆雕幾之美 素車之乘이라하니라 麻絻은 緝麻爲冕이라 所謂大裘而冕이니 不用衮龍之屬也라
士喪禮에 始死하면 主人散帶垂하되 長三尺이라하니라
史記
엔 作大路之素幬
하고 司馬貞曰 幬音稠
라 謂車蓋素帷
니 라하니라
兪樾曰 楊注에 未集은 不集丹漆也라하니라 則但言素而其義已足矣니 不必言未集이요
且未集二字는 義亦未足하니 楊注非也라 未字는 當爲末이라 素末一事요 素集一事라
蓋一本作末하고 一本作集이어늘 傳寫誤合之하고 而因改末爲未하여 以曲成其義하니 非荀子原文也라
末者
는 幦之叚字
라 上文絲末
의 楊注曰 末
은 與幦同
이라 禮記曰 君羔幦虎犆
이라하고 鄭云 覆
也
라하니
然則大路之素末은 亦卽素幦耳라 大戴記禮三本篇에 作素幭하니 幭與幦同이라
荀子에 作末之本은 與大戴合이라 集者는 幬之叚字니 集音轉而爲就라
詩小旻篇의 是用不集이 韓詩엔 作是用不就하니 是也라 故得讀爲幬라
爾雅釋訓에 幬는 謂之帳이라하고 釋文曰 幬는 本或作𢃖라하니 是幬字或從周聲이라
山海經中山經에 暴山 其獸多麋鹿𪊨就라하고 郭注曰 就는 雕也라하니라 然則以就爲𢃖는 猶以就爲雕矣리라
史記禮書엔 正作素幬라 荀子에 作集之本은 與史記合이라
先謙案 大戴禮엔 散麻作散帶하고 孔廣森云 帶는 要絰也라하니라
喪禮小斂에 主人始絰하되 散垂之하고 旣成服에 乃絞라
雜記曰 大功以上散帶라하니라 三者皆從質이라 故云一也라
注
楊倞注:大路는 殷나라 때 하늘에 제사할 때 사용하는 수레이니, 제왕이 타는 것이다. 未集은 붉은 칠을 이루지 않았다는 뜻이다. ≪禮記≫ 〈禮器〉에 “大路素而越席(大路는 소박하여 왕골 돗자리를 깐다.)”이라 하고,
또 ≪禮記≫ 〈郊特牲〉에 “丹漆雕幾之美 素車之乘(수레에 아름답게 주홍색을 칠하고 문양을 조각하지만 大路는 자연 그대로 꾸밈이 없는 수레이다.)”이라 하였다. 麻絻은 삼실을 짜서 면류관을 만든 것이다. ≪周禮≫의 이른바 ‘大裘而冕(〈천자가 하늘에 제사할 때는〉 큰 갖옷을 입고 삼베 면류관을 쓴다.)’이라는 말이니, 곤룡포 등속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儀禮≫ 〈士喪禮〉에 “始死 主人散帶垂 長三尺(사람이 처음 죽으면 주인은 허리에 두른 腰絰의 남은 부분이 흐트러진 채로 드리워지게 하되 그 길이는 석 자가 되게 한다.)”이라 하였다.
≪史記≫ 〈禮書〉에는 ‘大路之素幬’로 되어 있고, 司馬貞의 ≪史記索隱≫에 “幬는 음이 ‘稠’이다. 수레 덮개가 흰 천으로 된 것이니, 소박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라고 하였다.
○盧文弨:〈楊氏의〉 주 끝의 〈示質也는〉 옛 판본에 ‘亦質者也’로 되어 있다.
兪樾:楊氏의 주에 “未集은 붉은 칠을 이루지 않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素’만 말하더라도 그 뜻이 이미 충분하니 굳이 ‘未集’을 말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未集’ 두 자는 그 뜻이 또 충분치 못하니, 楊氏의 주는 틀린 것이다. ‘未’자는 마땅히 ‘末’로 되어야 한다. 素末이 한 건이고 素集이 한 건이다.
대체로 어떤 판본에는 ‘末’로 되어 있고 어떤 판본에는 ‘集’으로 되어 있었을 것인데, 옮겨 쓰는 과정에 이것을 잘못 합쳤고 또 ‘末’을 ‘未’로 고쳐 그 뜻을 왜곡시킨 것이니, ≪荀子≫ 원문이 아니다.
‘末’은 ‘幦’의 假借字이다. 윗글(19-15)에 보이는 ‘絲末’의 楊氏 주에 “末은 ‘幦’과 같다. ≪禮記≫ 〈玉藻〉에 ‘君羔幦虎犆(군주가 〈재계할 때 사용하는 수레는〉 염소가죽으로 수레의 가로대를 덮고 또 범가죽으로 가선을 두른다.)’이라 하고 鄭玄이 ‘〈幦은〉 수레의 덮개이다.’라 했다.”라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大路之素末’의 〈‘素末’은〉 이 또한 ‘素幦’이다. ≪大戴禮記≫ 〈禮三本篇〉에 ‘素幭’로 되어 있으니, 幭과 幦은 같다.
≪荀子≫에 ‘末’로 되어 있는 판본은 ≪大戴禮記≫와 합치된다. ‘集’은 ‘幬’의 假借字이니, 集은 발음이 바뀌어 ‘就’로 되기도 하다.
≪詩經≫ 〈小旻篇〉의 ‘是用不集(꾀하는 일 마침내 못 이루었네.)’이 ≪韓詩外傳≫에는 ‘是用不就’로 되어 있으니, 곧 이 경우이다. 그러므로 〈集자를〉 ‘幬’로 읽을 수가 있다.
≪爾雅≫ 〈釋訓〉에 “幬는 ‘帳’을 이른다.”라 하고, ≪經典釋文≫에 “幬는 어떤 판본에는 간혹 ‘𢃖’로 되어 있기도 하다.”라 하였으니, 이 ‘幬’자는 간혹 ‘周’의 성조에 속하기도 한다.
≪山海經≫ 〈中山經〉에 “暴山 其獸多麋鹿𪊨就(暴山이 있는데, 그곳에 사는 짐승은 고라니‧사슴‧노루‧독수리가 많다.)”라 하고, 郭璞의 주에 “就는 ‘雕(독수리)’이다.”라 하였다. 그렇다면 ‘就’를 ‘𢃖’로 쓰는 것은 ‘就’을 ‘雕’로 쓰는 경우와 같을 것이다.
≪史記≫ 〈禮書〉에는 ‘素幬’로 바르게 되어 있다. ≪荀子≫에 ‘集’으로 되어 있는 판본은 ≪史記≫와 합치된다.
先謙案:≪大戴禮記≫에는 ‘散麻’가 ‘散帶’로 되어 있고, 孔廣森이 “帶는 要絰(腰絰)이다.”라 하였다.
喪禮에 의하면 小斂 때 주인이 비로소 腰絰을 두르되 흐트러진 끈의 끝부분이 길게 드리워지게 하고 成服을 한 뒤에 비로소 꼬아 두른다.
≪禮記≫ 〈雜記〉에 “大功以上散帶(大功 이상의 친족은 흐트러진 끈으로 허리를 두른다.)”라고 하였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소박한 것을 따른 것이므로 ‘一’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