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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集解(3)

순자집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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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5 趙之奉陽
蘇秦說趙肅侯 肅侯之弟奉陽君爲相하여 不說蘇秦하니 蘇秦乃去之라하고
又戰國策 蘇秦說趙王曰 天下之卿相人臣 乃至布衣之士 莫不高大王之行義하여 皆願奉敎陳忠於前之日久矣
雖然이나 奉陽君妬하여 大王不得任事 是以外賓客游談之士하여 無敢盡忠於前이라하니라
盧藏用云 奉陽君名成이라하나 又案後語 奉陽君卒 蘇秦乃從燕而來하여 說肅侯合從之事
하니 卽公子成非奉陽君也


나라 봉양군奉陽君
양경주楊倞注:≪춘추후어春秋後語≫에 “소진蘇秦조 숙후趙 肅侯를 유세할 적에 숙후肅侯의 아우 봉양군奉陽君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소진蘇秦을 좋아하지 않으니, 소진蘇秦이 마침내 나라를 떠났다.”라 하고,
또 ≪전국책戰國策≫ 〈조책趙策〉에서 “소진蘇秦나라 왕을 유세하기를 ‘천하의 경상 대신卿相 大臣에서부터 일반 선비에 이르기까지 대왕께서 인의仁義을 행하시는 행위를 높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어 모두 대왕 앞에서 가르침을 받들거나 충언忠言을 올리기를 원한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봉양군奉陽君이 인재를 질투하여 대왕으로 하여금 국사를 전담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빈객과 유세하는 사람을 멀리하여 감히 대왕 앞에 충언忠言을 올린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노장용盧藏用이 “봉양군奉陽君의 이름은 이다.”라고 하였으나, 또 ≪춘추후어春秋後語≫를 살펴보면 봉양군奉陽君이 죽은 뒤에 소진蘇秦이 비로소 나라에서 들어와 숙후肅侯에게 합종合從에 관한 일을 유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공자성公子成무령왕武靈王 때 오히려 호복胡服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으니, 공자성公子成봉양군奉陽君이 아니다.


역주
역주1 後語 : ≪春秋後語≫의 약칭이다. 晉나라 孔衍(268~320)과 唐나라 盧藏用(?~약714)이 저술한 두 종류가 있는데, 여기서는 盧藏用의 것으로 보인다. 盧藏用은 幽州 范陽 사람으로, 자는 子潛이다. 進士에 급제한 뒤에 관직에 임용되지 못해 終南山에 은거하다가 則天武后 때 左拾遺를 시작으로 吏部侍郞과 黃門侍郞을 지냈다. 篆書와 隷書를 잘 쓰고 거문고와 바둑을 좋아하는 등 재능이 많았다고 한다.
역주2 公子成……猶不肯胡服 : 公子成은 趙나라 武靈王의 숙부이고, 武靈王은 肅侯의 아들로 이름은 雍이다. 武靈王이 胡服을 좋아하여 胡服 차림으로 말을 타고 활을 쏘자, 公子成이 胡服을 입는 것은 禮樂을 중시하는 성현의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반대하다가 결국 왕의 설득에 굴복하였다. 胡服은 오랑캐 의복이란 뜻으로, 중국의 서역과 북방 민족이 입는 간편한 형식의 복장을 말한다. ≪史記 권43 趙世家≫

순자집해(3) 책은 2021.01.29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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