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46 其所以貫理焉
이 雖億萬
이라도 已不足
萬物之變
이면 與愚者若一
하리라
注
貫은 習也라 浹은 周也니 子叶反이라 或當爲接이라
○兪樾曰 已는 猶終也니 言終不足以浹萬物之變也라 詩葛藟篇終遠兄弟의 傳曰 已相遠矣라하고 箋云 今已遠棄族親이라하니
是傳箋竝訓終爲已라 僖二十四年左傳婦怨無終의 杜注曰 終은 猶已也라하니라 故已亦猶終也라
先謙案 荀書以挾代浹하니 此亦當爲挾이라 作浹者는 後人所改라
사람들이 사물의 이치를 익히는 방법이 비록 억만 가지가 있더라도 끝내 그것으로 만물의 변화를 두루 파악하지 못한다면 어리석은 자와 마찬가지이다.
注
楊倞注:貫은 익힌다는 뜻이다. 浹은 고루 미친다는 뜻이니, 〈음이〉 子와 叶의 반절이다. 어쩌면 마땅히 ‘接’으로 되어야 할 것 같다.
○ 兪樾:已는 ‘終’과 같으니, 끝내 충분히 만물의 변화를 다 파악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한다. ≪詩經≫ 〈王風 葛藟〉편 “終遠兄弟(이제 이미 형제를 멀리했기에)”의 〈毛傳〉에 “已相遠矣(이미 서로 멀어졌다는 뜻이다.)”라 하고 〈鄭箋〉에 “今已遠棄族親(이제는 이미 친족을 멀리 버렸다.)”이라 하였으니,
이는 〈毛傳〉과 〈鄭箋〉이 모두 終을 ‘已’의 뜻으로 풀이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 “婦怨無終(부인의 원한이란 끝이 없다.)”의 杜預 주에도 “終은 ‘已’와 같다.”라 하였다. 그러므로 ‘已’ 또한 ‘終’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先謙案:≪荀子≫에는 ‘挾’으로 ‘浹’을 대신하였으니, 여기서도 마땅히 ‘挾’으로 되어야 한다. ‘浹’으로 된 것은 후세 사람이 고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