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荀子集解(4)

순자집해(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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議兵篇 第十五
15-1 臨武君與議兵於이라
臨武君 蓋楚將이니 未知姓名이라 戰國策曰 天下合從 曰 君有將乎아하니
春申君曰 有矣 僕欲將臨武君이라하니라 魏加曰 臣少之時好射 臣願以射譬하니 可乎아하니 春申君曰 可라하니라
魏加曰 異日者 與魏王處京臺之下라가 更嬴曰 臣能爲王引弓虛發而下鳥리이다하니라
有閒 鳴雁從東方來어늘 更嬴以虛發而下之 王曰 射之精 乃至於此乎아하니 更嬴曰 此孼也니이다하니라
王曰 先生何以知之오하니 對曰 其飛徐者 其故創痛也 其鳴悲者 久失群也
故創未息而驚心未去하여 聞弦音에도 烈而高飛 故隕也니이다하니라 今臨武君 嘗爲秦孼하니 不可以爲距秦之將하리이다하니라
趙孝成王 晉大夫趙夙之後 簡子十世孫이라 或曰 이라하니 臨武君 卽孫臏也라하니라
今案史記年表컨대 齊宣王二年 孫臏爲軍師하니 則敗魏於馬陵至趙孝成王元年 已七十餘年이라 年代相遠하니 疑臨武君 非此孫臏也
○盧文弨曰 案楊氏改書名作荀卿子하되 而此篇正文仍作孫卿子하여 依漢以來相傳之舊也하니
本篇內微子開封於宋注甚明이라 注更嬴 楚策作更羸(리)
又其故創痛也 策無其字하고 此注脫故字하여 今增이라 又故創未息 作故創痛未息이나 今從策刪痛字


제15편 용병술用兵術에 관한 토론
용병술用兵術에 관해 순자荀子의 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전략戰略전술戰術로 적을 제압하기에 앞서 민중과 군주가 일치단결하여 삼군三軍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주가 예법禮法을 숭상하고, 도의道義를 귀하게 여기고, 현능한 인물을 좋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정책과 법령이 신의가 있고, 상벌을 분명히 하고, 지휘통제권이 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등 그 해법을 제시하였다. 아울러 장군이 갖춰야 할 여러 가지 원칙도 천명하였다.
그 사상의 핵심은 ‘인의仁義’를 중시하여 횡포를 금지하고 위해를 제거하며 덕으로써 다른 나라를 합병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편은 대부분 대화체로 되어 있는데, 순자荀子손경자孫卿子로 표기한 점으로 볼 때 그의 문인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임무군臨武君손경자孫卿子 효성왕孝成王 앞에서 용병술用兵術에 관해 토론하였다.
양경주楊倞注임무군臨武君나라 장수로 보이는데, 그 성명은 알 수 없다.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천하의 제후들이 연합하여 〈나라에 대항할 당시에〉 나라가 위가魏加을 파견하여 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을 만나 물어보게 하였다. ‘당신은 군대를 거느릴 대장을 정했습니까?’ 하니,
춘신군春申君이 ‘그렇소, 나는 임무군臨武君을 대장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하였다. 위가魏加가 ‘신은 어릴 적에 활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활 쏘는 것을 가지고 이 문제를 비유해볼까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하니, 춘신군春申君이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위가魏加가 ‘어느 날 경영更嬴나라 왕과 경대京臺 밑에 서 있다가 〈고개를 들어 날아가는 새를 보았습니다. 이때〉 경영更嬴나라 왕에게 「신이 왕을 위해 활을 빈 시위만 잡아당겨 새를 떨어뜨려보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끼룩끼룩 우는 기러기가 동쪽에서 날아오자, 경영更嬴이 활을 빈 시위만 잡아당겨 떨어뜨렸습니다. 왕이 「신묘한 활솜씨가 마침내 이 정도까지 도달했단 말이오.」라고 하니, 경영更嬴이 「이것은 병든 기러기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이 「선생은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날아가는 모양이 느린 것은 예전에 상처를 입어 아프기 때문이고, 울음소리가 처량한 것은 오래전에 그의 무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입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데에다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 않아 시위 소리만 듣고도 놀라 솟구쳐 높이 날았기 때문에 〈예전의 상처가 터져〉 땅으로 떨어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임무군臨武君도 일찍이 나라 군대에 패배하였으니, 나라 군대에 대항할 대장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라 했다.”라고 하였다.
효성왕孝成王나라 대부大夫 조숙趙夙의 후예니, 간자簡子의 10대손이다. 혹자는 “유향劉向의 〈후서後敍〉에 ‘손경孫卿나라에 이르러 손빈孫臏 효성왕孝成王 앞에서 용병술에 관해 토론하였다.’라 하였으니, 임무군臨武君은 곧 손빈孫臏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사기史記≫ 〈연표年表〉를 살펴보건대, 선왕宣王 2년에 손빈孫臏군사軍師가 되었으니, 그가 마릉馬陵에서 나라 군대를 격파한 때부터 효성왕孝成王 원년까지는 이미 70여 년이나 되어 연대가 크게 차이가 나니, 아마도 임무군臨武君은 이 손빈孫臏이 아닐 것이다.
노문초盧文弨:살펴보건대, 양씨楊氏가 책이름은 ≪순경자荀卿子≫로 바꿨으나 이 편의 본문에서는 원래대로 ‘손경자孫卿子’라 하여 나라 이후 전해오는 옛 명칭을 따랐으니,
〈그 이유가〉 이 편 안(15-112)에 나오는 ‘미자개봉어송微子開封於宋(미자微子 나라에 봉해졌다.)’이라 한 곳의 〈양씨楊氏〉 주에 매우 분명히 드러나 있다. 〈양씨楊氏〉 주의 ‘경영更嬴’이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更羸’로 되어 있다.
또 ‘기고창통야其故創痛也’는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는 ‘’자가 없고 여기 〈양씨楊氏〉 주는 ‘’자가 누락되었기에 여기서는 보충하였다. 또 ‘고창미식故創未息’은 ‘고창통미식故創痛未息’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전국책戰國策≫ 〈초책楚策〉에 따라 ‘’자를 삭제하였다.


역주
역주1 孫卿子 : 荀卿子와 같다. 荀을 ‘孫’이라 한 것은 漢 宣帝의 이름자가 詢이므로, 후대에 황제의 이름자와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 음이 비슷한 글자로 바꾸어 썼다. 卿과 子는 존칭이다.
역주2 趙孝成王 : 전국시대 趙나라 군주로, 이름은 丹이다. 재위기간은 B.C.265~B.C.245년이다. 즉위 초에 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3개의 성을 빼앗겼고 7년에 秦나라의 이간책에 말려들어 명장 廉頗 대신 趙括을 장수로 임명하여 秦나라 長平과 교전한 끝에 군사 40여만 명을 잃었다. 이때 秦나라 군대가 진격하여 도성 邯鄲을 포위하였는데, 楚나라와 魏나라의 도움으로 포위에서 풀려났다. 15년에 燕나라가 공격해올 때는 廉頗가 장수가 되어 대승을 거두었고 18년에는 秦나라의 공격을 받아 楡次 등 37개의 성을 빼앗겼다. 이렇듯 그가 재위한 21년 동안 큰 전쟁을 많이 겪었으므로 전쟁의 승패에 관해 관심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역주3 趙使魏加見楚春申君 : 魏加는 趙나라 사람이다. 楚 考烈王 22년(B.C.241)에 楚나라가 趙‧魏‧韓 등 5개국과 秦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는데, 이때 趙 悼襄王이 그를 파견하여 春申君을 만나 楚나라는 대장을 누구로 임명할 것인지에 관해 물어보게 하였다.(≪戰國策≫ 〈楚策4〉)
春申君은 楚나라 재상으로 이름은 黃歇이다. 선비를 좋아하여 문하에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으며, 齊 孟嘗君‧趙 平原君‧魏 信陵君과 함께 당대에 비중 있는 명사였다.
역주4 更嬴(영) : 魏나라 사람으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일설에는 甘蠅이라고도 한다.
역주5 劉向敍云……議兵趙孝成王前 : 劉向敍는 劉向의 ≪孫卿子≫ 〈後敍〉를 가리킨다. 劉向의 ≪新序≫ 권3에 이 내용이 들어 있는데, 거기에 ‘孫卿 與臨武君 議兵於趙孝成王前(孫卿이 臨武君과 함께 趙 孝成王 앞에서 용병술에 관해 토론하였다.)’으로 되어 있고 ‘孫臏’은 언급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혹자가 인용한 〈後敍〉의 내용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순자집해(4) 책은 2022.08.31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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